전세는 우리나라만 있다?
전세는 우리나라만 있다?
퇴계 이황 선생도 전세살이 한 이야기
퇴계 이황 선생도 전세살이 한 이야기

전세는 영어로도 ‘전세(Jeonse)’예요. 우리말을 그대로 쓰는 이유는 한국에만 있는 주택 임대 방식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에 전세는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확실한 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거예요. 심지어 1,000원짜리 지폐 속 이황 선생도 전세살이를 하셨어요.

퇴계 이황도 경험한 전세살이

한양의 셋집에 동산 뜰이 비었더니 해마다 울긋불긋 온갖 꽃이 피어나네 -이황 <퇴계선생문집> 중 시 구절-

'한양의 셋집'이라는 대목에서 이황 선생도 셋방살이를 한 걸 알 수 있어요. 유학을 신봉한 조선에서 어깨에 힘 좀 주시던 분이 어쩌다 셋방살이를 했을까요? 이황 선생의 고향은 경북 안동이고, 일가친척도 다 그 근처에 살았어요. 과거에 급제해 한양에 올라왔지만 연고도, 목돈도 없다보니 셋방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요즘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죠?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느끼는 주거의 어려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니 놀랍기도 합니다.

전세라는 말은 언제부터 썼을까?

‘전세’라는 단어가 공문서에 처음 등장한 건 1910년이에요. 조선총독부가 만든 ‘관습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집값의 50~70% 정도를 맡겼대요. 물론 이사를 나갈 땐 돌려받았고요. 그 시절엔 방이 여럿인 한옥도 있었는데, 방 한 칸 단위로 전세를 놓기도 했어요. 요즘 말하는 ‘룸 렌트' 개념이죠. 계약기간은 지방에선 통상 1년, 서울에선 100일 단위였어요. 지금보다 계약기간이 훨씬 짧았죠. 당연히 이사도 그만큼 자주 다녔을 테고요.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1970~1980년대

전세는 일제강점기 이후 1970년대에 더 활발해졌어요. 수요는 역시 청년이었죠. 일자리를 찾아 죄다 서울로 올라왔고 집주인도 전세제도를 적극 활용했어요. 청년에게 전세보증금을 받아 다른 집을 ‘세 끼고 사는’ 행위가 대표적이었죠. 1980년대에 들어서는 전에 없던 뉴스가 등장해요. 서울에 지하철이 개통했다는 소식과 함께 교통이 편리해지며 서울의 전셋값이 폭등했다는 기사예요. 기사 말미엔 이런 내용도 나와요. “전셋값이 올라 청년들이 서울 외곽으로 밀려난다.” 지금과 판박이죠?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는 전세제도가 사라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와요. 잇따른 기준금리 인상에 전세대출 금리가 쭉쭉 오르고 있고, 사람들이 월세로 쏠리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반대 의견도 있어요. 지금은 전세대출 금리 부담에 사람들이 월세를 선호하지만 앞으로 기준금리가 더 오르면 전월세전환율도 오를 테고, 그만큼 월셋값도 따라 오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에요. 한마디로 전세제도는 사라지지 않을 거란 얘기.

전월세전환율 전세를 월세로 바꿀 때 적용하는 비율. ∙ 22년 10월 기준 KB부동산의 서울 아파트 전월세전환율은 3.28%였어요. 1억원 전세를 월세로 돌릴 때 집주인은 연간 328만원(1억원×3.28%), 매달 27만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

반면 시중은행 전세대출 금리 상단은 조만간 8%를 넘어설 전망이에요. 아직 많은 이가 월세를 찾는 이유입니다.

전세제도는 정말로 우리나라에만 있을까? 한국처럼 탄탄한 금융시스템을 갖춘 나라 중에 전세제도를 운영하는 사례는 없어요. 물론 볼리비아의 안티크레티코(anticrético), 인도의 보기(bogey) 등이 비슷하긴 해요. 하지만 이들 나라의 제도는 사금융의 성격이 훨씬 짙어요. 가령 안티크레티코는 일종의 대출 수단이에요. 집주인이 정해진 기간 내에 세입자에게 돈을 갚지 않으면, 세입자가 주택의 소유권을 넘겨받게 되죠. 무시무시하죠?

본 콘텐츠는 뉴스레터 <부딩>과 함께 만들었어요. ∙ 2022년 12월 1일 기준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