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나도 없던 시절, 가난해도 서럽지는 않았네
너도 나도 없던 시절, 가난해도 서럽지는 않았네
부모님의 이력서➊
부모님의 이력서➊
2025.03.28
2025.03.28

부모님의 이력서📮 복잡한 금융 생활 속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할까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인생 선배인 부모님에게 물었습니다.

사용자님,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 혹시 보셨나요? 고단했던 60년대, 평범한 이들의 삶을 따뜻하게 조명하는 내용으로 많은 분들에게 위로를 주고 있어요. 가난하고 굴곡진 그 시절,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살아왔을까요? 우리 주변 평범한 어머니 다섯 분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았어요.

나의 엄마, 김용임 씨 이야기

김용임 씨의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들을 이력서에 정리했다. 화려한 경력은 아니었지만, 나의 엄마 김용임 씨는 언제나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김용임 씨는 1947년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에서 3남 5녀 중 둘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논이 스물세 마지기, 밭이 열 마지기 있는 넉넉한 집으로, 추수기에는 대청마루에 가마니가 높이 쌓였다.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어머니가 아프면서 집안 살림을 실질적으로 도맡게 되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 아궁이에서 뗀 불로 8남매와 부모님과 일꾼들까지 20인분의 밥을 하고 새참을 만들며 살다 오빠가 결혼하여 올케가 생기자 “아부지, 나 힘들어서 서울 갈라요.” 하고 서울로 올라온다. 72년에 고향 남자와 결혼한다.

72년 2월, 결혼식을 올렸다. 양장점에서 일하던 친구가 첫 작품으로 드레스를 만들어줬다.

너도 나도 없던 시절, 가난해도 서럽지는 않았네.

- 엄마,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어떻게 살았어? 처음에 친구가 일하는 모래네에 있는 공장에 다녔어. 하숙집에 살았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 먹기도 하고. 한 겨울에 차비가 없어서 화곡동에서 시청 앞까지 걸어왔으니 말 다 했지. 같이 올라온 남동생이 '요꼬 공장' 다녀서 돈을 벌어서 보태주고 그랬네.

*요꼬 공장: 옷 짜는 공장

- 아빠 만나 결혼하고도 정말 가난했잖아. 어떤 일들을 했어? 고모 둘이 버스 안내양을 해서 우리 도와주고 나는 봉투 붙여 팔았지. 김포공항에서 나오는 타이프지라고 수입 종이가 있어. 고물상 아저씨한테 그걸 아주 싸게 사. 그 종이를 펴서 밀가루풀을 끓여 붙여 봉투를 만드는 거야. 내가 얼마나 손이 빨랐나 몰라. 그걸 100장씩 묶어 25개씩 머리에 이고 영등포 시장, 용산 시장에 팔러 다니지. 그때는 가게에서 비닐 봉투가 아니라 종이 봉투를 쓰잖아. 종이가 너무 무거워서 지나가는 아저씨들에게 “좀 내려주세요”라고 하면 “젊은 아줌마가 참 열심히 사시네요.” 그랬다. 봉투를 다 팔면 3만 원인데 원가는 5천 원이야. 기분 좋아 흥얼흥얼거리면서 집에 왔지. 어려운 시절에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이냐. 너를 업고 가내수공업에도 다녔는데 송이버섯을 손질해서 외국으로 수출하는 곳이야. 그 버섯 몇 개 가져다가 저녁에 된장찌개 끓이면 기가 막히게 맛있었지.

1980년 창경원에서 세 딸과 함께. 다섯 살 둘째인 나는 언니에게 기대 있다.

- 돈이 없어서 서럽거나 힘들었을 때는 없었어? 사실 그때는 죄다 그렇게 가난하게 사니까 나만 어렵다는 감각이 없었다. 그때그때 먹고 사는 거야. 쌀을 외상으로 사다 먹기도 했는데 그래도 제 날짜에 돈은 꼭 갖다 드렸더니 신용이 생기니까 다음에 또 외상 쌀을 주시고 그랬지.

80년대, 나라도 잘되고 정육점도 잘되고

79년에 막내딸을 낳은 후 남편이 남대문에서 돼지 도매업을 시작하면서 호경기를 만났다. 1980년대 초반 국가 경제가 급성장하고 육류 소비가 늘며 돼지고기는 서민들의 주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부모님은 신림동에 가게를 차린 후 매일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요일도 없이 매일 고기 장사를 했다. 아빠가 새벽에 열 마리씩 돼지를 받아 손질해 근방 정육점에 보내고 엄마는 소매 장사를 담당했다. 특히 명절은 몇 주 전부터 단단히 준비해야 하는 ‘대목’이었다. 주부들이 장보는 시간이 지나면 금전출납기에 지폐들이 수북이 쌓이곤 했다. 저녁마다 엄마는 현찰을 세서 노랑 고무줄로 묶어 놓았다.

- 우리 정육점 장사 정말 잘됐지? 신림 2동 관악정육점이지. 그때는 마트가 없고 동네에 정육점이 하나씩 있잖아. 설이나 추석 때는 가게 밖까지 줄을 몇 미터씩 설 정도로 잘됐어. 지금처럼 삼겹살만 인기가 있는 게 아니라 골고루 팔려서 삼겹살만 더 비싸거나 부족하진 않았어. 돼지고기 한 근에 3000원 정도였던가. 김치찌개 거리 반 근 달라 하면 1500원, 2000원 받아 신문지에 돌돌 말아 싸주고. 식당 납품이 중요해. 열 근, 스무 근씩 사가니까. 족발을 좋은 것들로만 가져가는 식당이 있었는데 그 식당이 우리 덕분에 잘됐지. - 그때 돈 관리는 누가 하고, 생활비는 어떻게 썼어? 아빠가 다 관리했지만 서운한 건 없었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옷은 양장점에서 맞춰 입거나 백화점에서 샀어. 쫀쫀하지 않게. 이를 테면 시장 옷 두 개 살 돈을 아꼈다가 백화점에서 하나 사는 거야. 그러면 내 인생도 그렇게 잘 풀리는 것 같더라고. 한번은 동네 아줌마를 만났는데 놀랍다는 듯이 “어머, 백화점을 다니세요?” 하고 물어보더라. 난 사면 좋은 걸 사야 하니까 자잘하게는 안 써.

45세의 김용임 씨. 바닷바람에도 덤덤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 예전부터 시댁 식구, 친정동생 다 거뒀잖아. 왜 그랬어? 객지에서 고생하는데 어떻게 그냥 두고 보냐. 우리가 험한 고생을 하면서도 다 챙겼어. 삼촌 고등학교 보내고 이모들 데려다 같이 살고 음식해서 결혼도 시키고. 정말로 어려울 때도 도왔어. 알아주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그래서 복 받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해.

장어집부터 주류백화점까지, 끝나지 않는 자영업자의 계절

정육점을 접은 이후 수많은 업종의 매장을 개업했다 폐업했다. 아빠가 사업 아이템을 가져와서 가게를 차리면, 가게를 청소하고 손님 상대하는 건 주로 엄마가 하는 식이었다. 집에서는 늘 행주 삶는 냄새가 났다. 아침에 싱크대를 반짝반짝 닦아놓고 집에서는 행주 삶는 냄새가 났다 가게로 출근해 해가 질 때까지 그날 팔아야 하는 물건을 팔고 저녁에 집에 와 식구들 밥을 지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엄마가 낮에 집에 있었던 기억이 거의 없다. 당신 말로는 집에서 요리하고 살림 하는 것이 체질이라고 했지만,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감당했다. 언제나 일하는 사람이었다.

- 정말 여러 종류의 장사를 했잖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 우리가 살던 2층 건물에서 장어구이 식당을 했는데 장어값이 올라서 이익이 잘 안 남으니 세를 주고 우리는 큰길가에 가게를 얻었지. 브랑누아라는 신발 가게를 했는데 덤핑 물건을 떼어다 가게 앞에 펼쳐놓고 만 원, 이만 원에 팔면 하루에 수십 켤레씩 팔려. 그러다 가자주류 강남 본사에 가보고 너무 근사해서 브랑누아 자리에 대리점을 차렸지. 시바스 리갈, 조니 워커를 제일 많이 팔았네. - 장사하면서 자존심 상하거나 비굴해지거나 그런 적은 없었어? 장사할 때 난 손님들 비위를 잘 맞춰. 아줌마 왜 이렇게 장사를 잘해요? 그랬다니까. 내가 먹고 사는 건데 뭐가 자존심 상하냐. 돈보다도 내 일이기 때문에 즐거운 거야. 예민하지가 않았어. - 엄마, 내가 이제 가정 경제를 책임지게 되었잖아. 돈을 어떻게 벌고 써야 할까. 말하자면 10만 원을 벌면 5만 원은 쓰고 5만 원은 저축해야지. 미리 댕겨 쓰지 말고. '마이가리'라는 것이 뭔지 아냐?

*마이가리: 가불과 비슷한 말로 품삯이나 월급을 미리 받는다는 뜻의 일본어

그거 하면 안 돼. 간단하고도 쉬운 원칙이야. 받고 나서 써야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쓰면 안 돼. 그런 식으로 관리하면 돈이 다 도망가. 꼭 저금은 해야지.

고향 무안의 갯벌에서 석화를 까는 김용임 씨. 엄마는 언제나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너무 전전긍긍하지 마. 그런다고 돈이 오는 것도 아니잖아. 너도 배운 걸로 벌 수 있을 때까지 벌어야지. 60살이 넘으면 여기저기 아프고 병원비가 많이 들어. 너도 열 살만 더 먹으면 지금이랑 다를 거야. 젊어서 돈 없는 건 부끄럽지 않지만 늙으면 확실히 서러워. 누가 벌어다 줄 사람도 없는데 ‘내 돈’을 쥐고 있어야지.

언제나 떳떳하고 주눅 늘지 마. 최선을 다 하면 그럴 수 있어.

엄마는 스스로도 단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잡생각이 별로 없고 과거에 대한 원망도 회환도 없이 오늘을 살아간다. 그렇게 평생 육체노동을 하고 장사하고 돈을 벌며 살았는데 엄마만의 경제관념이나 인생철학이 있다면 가르쳐 달라고 하자 “그런 것 없다.”고 말한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했을 뿐이라고. 어쩌면 철학이 없는 것이 엄마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딸들에게 세심하게 신경 써주진 못했지만 도시락 한번 놓친 적 없었다. 있는 힘껏 남편이 하는 일을 도왔지만 싸울 때는 지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변함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는 나무 같았다.

- 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난 예민하지 않아. 머릿속이 단순해. 그냥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내 앞에 닥친 현실에 최선을 다해. 나쁜 것은 생각이 안나. 그 험한 풍파를 겪었는데도 지금은 추억으로 여겨져서 아름답고. 내 성격 따라올 사람이 몇이나 되냐. 나는 남의 말에 절대 안 휘둘려. 누가 나보고 못났다고 해도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아무렇지도 않아. 너도 좌절하고 그러면 안 돼. 너도 나를 닮아.

육체노동보다는 지식 노동으로 먹고 사는 나, 항상 과거를 곱씹고 후회하고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나, 엄마와 달리 요리와 살림을 싫어하는 나. 하지만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점들은 엄마에게서 온 것임을 실감한다. 모진 일을 겪어도 며칠 앓고 나면 일어난다. 매일 아침 집안일을 마친 후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간다. 과소비하는 일은 없지만 쇼핑이나 취미 생활 등으로 나에게 과감히 투자하기도 한다. 결국에는 나를 긍정한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해. 그것이 참 좋은 것이더라고. 살아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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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콘텐츠는 '딸세포출판'과 함께 만들었어요. 딸 노지양 씨가 질문하고 엄마 김용임 씨가 답변했어요.

'폭싹' 고생한 우리 부모님 이야기 여기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