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지킨 것은 '자존심'이었다
엄마를 지킨 것은 '자존심'이었다
부모님의 이력서➍
부모님의 이력서➍
2025.05.04
2025.05.04

부모님의 이력서📮 복잡한 금융 생활 속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할까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인생 선배, 부모님께 질문했습니다.

나의 엄마 박영선 씨 이야기

1956년, 박영선 씨는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에서 4녀 3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공부를 곧잘 했으나 중학교까지만 졸업하고 마산수출지구의 공장으로 향했다. 오빠들이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그녀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다. 1975년, 학업에 미련이 남았던 영선 씨는 마산여고에 방송통신고등학교가 설치되자마자 1회로 입학한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라디오로 수업을 들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수업을 듣고

- 엄마는 언제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어? 나는 중학교 졸업하기 전에 10월부터 돈 벌러 나갔어. 집 근처에 ‘건강모방’이라고 가내 공업 하는 모직 회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한 2개월 다니다가 수출자유지구가 임금이 세고 대우가 좋다고 해서 옮겼어. 내가 갔던 데는 ‘에프원’이라고, 일본 사람이 하는 공장이라 가서 바느질하고 그랬다. 내가 에프원에 우리 동네 애들 네 명을 취직시켰다 아이가.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고향 친구와 찍은 사진. 앳된 얼굴이 눈에 띈다.

나는 거기 들어간 지 2년 만에 조장이 됐네. 60명 중에 제일 ‘오야붕’이 된 거야. 그때 대우가 좋았다. 9시부터 6시까지, 딱 8시간 일 시키고, 점심시간 한 시 간 주고, 잔업도 2시간 이상 안 시켜. - 월급은 받아서 어떻게 했어? 나는 월급봉투 그대로 집에 갖다줘버렸지. 한 푼 떼는 것도 없어. 차비도 안 드니까 돈 십 원도 안 쓴 달도 있어. 집하고 회사밖에 몰랐어. 어디 놀러 다니고 그런 것도 몰랐고. 그나마 돈 쓴 건 양장집 가서 옷 산 것 밖에 없었어. 원피스? 이거 다 맞춤이야. 그때는 기성복이 없었으니까. 옛날에 ‘한일합섬 애들은 먹어서 조지고, 마산지구 애들은 입어서 조진다’는 말이 있어. 나도 수출지구 앞 부림시장 양장점에 단골이었지.

양장점 단골이었던 영선 씨(가장 왼쪽)의 모습. 지금 봐도 세련된 투피스에 구두 굽도 상당하다.

- 그때 돈이 있다면 뭘 하고 싶었어? 내가 마산통신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79년도에 졸업할 때 나는 1등해서 교육감상 받고, 2등한 애는 진주교대 갔으니 학교 선생 됐을 거다. 나는 실력이 되는데 대학 갈 생각을 못 했다. 그때 대학을 갔으면 내 인생이 확 바뀌었지. - 엄마는 왜 대학 갈 생각을 못 했어? 오빠들이 군대를 한 번에 가버리는 바람에 내가 벌어 먹고 살았잖아. 어떤 이유가 있어도 니는 대학을 가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니까. 집 생각하지 말고 죽든가 살든가 대학을 가라고 안 하드나. 그게 뼈 있는 말이다. 내가 그래 못 했기 때문에, 집안 사정 봐 주다가 내 인생은 뒤로 밀렸기 때문에 그런단 말이야.

만화방부터 한복집까지, 결혼 후 틈새 노동을 찾아서

1981년, 영선 씨는 결혼했다. 뒤늦게라도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맘처럼 되지 않았 다. 남편은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다. 시부모는 한 동네에 살았다. 영선 씨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남의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면서 만화방을 운영했다.

- 그때 만화방 할 때는 만화책이 얼마였어? 만화책에 한 권에 천원 하고, 대여비가 100원인가 했다. 핫도그도 팔았다. 학교 앞이니까 애들이 잘 사 먹겠다 싶었지. 그렇게 해서 장사하는 돈으로 둘이 충분히 생활비 하고도 남았지. 느그 아버지 월급이 그때 10만원이었는데, 1년 넘게 안 쓰고 차곡차곡 모았다. 돈을 조금 모으려고 하니까 집주인이 딱 샘을 내더라. 가게를 한 1년 했을 때인가, 장사가 잘 되니까 우리 내보내고 자기 여동생한테 가게를 하게 하는데, 6개월 만에 망해서 나가데. - 결혼한 뒤에 경제권은 누가 쥐고 있었어? 생활비는 내가 관리하고, 큰돈은 느그 아부지가 자기 통장에 넣어놨지. 우리가 3년 동안 돈을 많이 모았어. 만화방 하면서 모은 돈에 전세금에 다 합치니까 1000만원 정도 됐지. 근데 어느날 통장을 보니까 아무리 봐도 이상한거야. 세상에, 느그 아부지하고 할매가 짝짜꿍해서 내 몰래 시이모한테 돈을 빌려줬더라. 그러고 나서 시이모 집이 딱 부도가 나 버린 거야. 이사 갈 집은 계약했지, 돈은 떼여 버렸지, 내가 여기 빌리고 저기 빌리고 온 데 대출을 해서 집값을 채워 넣었다가 이자를 감당 못해서 그 집에 세를 주고, 우리가 촌구석에 달세로 이사 간 거 아이가. 니를 거기서 낳았다.

믿었던 가족에게 돈을 떼이고, 쫓기듯 셋방살이를 하던 중에 내가 태어났다.

- 엄마는 왜 계속 밖에서 돈을 벌었어? 느그 아부지 공무원 월급 가지고 한 달 생활이 안 돼. 저축할 게 전혀 없지. 할매랑 할배도 같이 사는데 생활비는 작게 드나. 우리가 이사 왔다고 고모네들이 놀러 와서 차 한 대 빌려서 놀이동산에 놀러간 적이 있다. 그때 빚이 20만원인가 생겼는데, 그걸 몇 년에 걸쳐서 갚았다. 그 정도로 여유가 없으니까 너 돌 때부터 내가 일을 하러 나갔지. 한복집 차리려고 한복학원도 다니고. 나는 집에 있을 성질이 아니야. 옛날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집에 살림만 살고 그게 안 돼. 밖으로 나가서 내 걸 배우고, 내 생활을 하고 싶은 거야. - 엄마는 돈 버는 게 좋았어? 좋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잖아. 집안 살림에 보탬도 되고. 내 밑에 쓰는 돈은 없어도 좋았다.

나는 자존심이 나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93년, 영선 씨의 남편은 공무원을 그만뒀다.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남편이 주식, 경마 등에 손을 대며 가세가 기울었다. 영선 씨는 더 열심히 일했다. 오로지 돈을 많이 벌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10년 뒤, 영선 씨는 자식 둘을 데리고 집을 나간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자유를 얻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피할 수 없었다. 전문 기술이 없는 40대 중반의 영선 씨는 알바 자리를 전전했다.

고된 일을 하느라 굳은 영선 씨의 손.

- 엄마는 왜 아무에게도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어? 도움을 받으면 마음에 빚이 많아. 니가 힘들게 학교 졸업한 거는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근데 도움을 받으면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옛날에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그런 말이 분명 나온다. 나는 그런 게 싫은거야. 나는 자존심이 내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한테 빌리는 거는 절대 안 좋아한다. 사람 이 도움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어야 되는데, 나는 내 것만 주기를 좋아하지, 남한테 빌려오는 건 용납 못 하는 사람이라 고생을 많이 했어. 나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사람은 혼자라. 그러니까 내가 책임을 져야 돼.

박영선 씨는 돈 대신 자존심을 지켰다. 딸은 어머니의 취향을 고스란히 물려 받았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를 그만두고, 1인 출판사를 만들어 엄마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겠다고 고군분투했다. 영선 씨는 딸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럽다. 책을 팔아서 돈 벌기가 그렇게 어렵다는데, 딸이 안정적으로 먹고 살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요즘도 가끔 영선 씨는 딸한테 공무원을 권하곤 한다. 하지만 출간을 앞두고 딸이 돈 걱정을 하며 밤잠을 못 이룰 때 영선 씨는 이렇게 말 했다.

- 책을 내놨는데 안 팔리면 어쩌지? 모아둔 돈을 까먹을까 봐 너무 무서워, 엄마. 책 만드는 데 돈 얼마 드는데. 500만원? 1000만원? 야, 니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그 돈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몇 천, 몇 억도 날려봤다. 실패해도, 까먹어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해라. 내가 돈 100만원 보태줄게.

엄마가 평생 모은 재산은 주택 보증금을 제외하면 천만원도 안 된다. 엄마 주머니에서 나온 백만원은, 몇 년을 모아야 하는 큰돈이다. 그것은 등록금 한번 대주지 못한 미안함에서 나온 돈이다. 영선 씨는 평생 가장으로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다. 비록 그 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안다. 눈앞의 돈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내가 살면서 받은 가장 큰 투자는, 내가 오롯이 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엄마가 온몸으로 확보해준 시간과 공간이다. 비록 남 보기에는 남루했을지라도 당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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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콘텐츠는 '딸세포출판'과 함께 만들었어요. 박영선 씨의 인생 이야기는 책 <나는 엄마가 먹여살렸는데>에서 더 만나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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